생 활 정 보

서울 각 지명 유래

최윤영(연산동) 2017. 8. 4. 23:11

                                     


방 화

산의 형국이 꽃피는 모습과 같은 개화산옆에 발달한 동네라는 뜻으로 생겨난 동명에서 유래

개화산
산의 모양이 꽃피는 형국을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개화동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

하는 높이132m의 개화산의 영향으로 유래됨

김포공항
김포공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송 정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울창했고 이곳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소나무로 된 정자가 있으므로

그 정자 이름을 송정이라 하고 일대를 송정리라 부른데서 유래

마 곡
옛날에 이 동네에 삼(麻)을 많이 심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발 산
내·외발산동이 경계를 이루는 해발72.3m로 수명산이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습이라하여

발산이라 불림

우장산
우장산은 내발산동과 화곡 제5동에 걸쳐 있는 높이98m의 산으로 옛날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산으로도 유명하다.우장산이란 이름은 이산에서기우제를 지내면 즉시비가 내리므로 반드시

우장을 준비하여 기우제에 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 곡
예로부터 땅이기름져 벼가잘되는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누렇게 익은벼가 계곡에서

황금물결치는 풍경을 이루었다고 하여 유래됨

까치산
봉제산(매봉산)일대에는 예로부터 까치가많이 서식하였으나 화곡동 개발계획에따라 봉제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봉제산 일대의 까치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비교적 늦게 개발된 이곳 까치산(해발 73.5m)으로 몰려들게 되어 까치산이라는 산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신 정
자연마을이었던 신기(新幾:신트리)의 신(新)자와 은행정의 정(亭)자를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유래함.

목 동
목동의동명은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천군 남산면의 작은부락인 달기리,

엄지리,남아리, 모새미, 마장안을 합쳐 외목동, 내목동, 월촌리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牧洞

(목동)이라 하였고 점차 표기가 달라져木洞(목동)으로 불려졌다

오목교
조선초 한강의 3대나루터에 속했던 양화나루를건너 경인지역으로 통행하기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했던 안양천 위에 세워졌던 다리이며,당시 오목내라 불리던 지금의 안양천위에 다리

가 세워지면서 오목교(梧木橋)라 불리게 됨

양 평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어 서민들의 한강도강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

근처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것으로 楊花津의 楊자와 벌坪자를 따서

"양평"이라 명명됨

영등포구청
영등포구청역은 인근에 영등포구청이 있어 명명되었고, 영등포란 명칭은 조선시대에 있는

성황당에서 영등포굿을 했던 관계로 영등포라는 이름이 불리어지게 되었다.

영등포시장
1936년 일제칙령에 의거 영등포시장이 형성되었고, 1967년 당시 시장의 명에 의거 현대화

상설시장으로 모한 이래 현재에 이름

신 길
샛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마주보고있는 신길동은 조선시대에 서울로들어오는 영등포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신길동의 이름은 조선시대 포구로서 신기라고 불려진 마을이 새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여의도
예로부터 라의주로 불렸던 섬으로 홍수에 잠길 때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 부근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 섬","너의 섬"하고 지칭하던 데에서 이것이 한자말

여의도(汝矣島)로 호칭됨

여의나루
옛날마포와 여의도를잇는 나루터가 마포와여의도 동쪽에형성되어 교통을원활하게 하였으나

한강다리 건설로 없어졌던 여의나루터에 1986년 유람선 선착장이 개장되었다.

여의나루 역명은 여의나루터 옛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 포
우리말 삼개로 불리어지는 포구 이름 마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삼(麻)개(浦)의 한자음에서 따옴

공 덕
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덕",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

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

애오개
애오개는 "작은 고개" 또는 어린애와 관련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사이에 있는 작은 고개라는 의미에서 아기고개, 아이고개,

애고개, 애우개로 호칭되었음

충정로
충정로는 순국선열의 대표인물인 충정공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하여 붙였던 것으로 충정로는

1946년 10월 1일부터 부르게 되었다.

서대문
중국과 통하는 의주로의 관문으로 도성 서쪽의 정문이다. 서대문의 정식명칭은 돈의문이며

새로운 문이란 뜻으로 새 문, 신문이라고도 불림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정문으로써 당초1359년(태조4년) 9월에창건되어 정도전에의해 사정문

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7년)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종로3가
조선시대에 인정과 파루라고하여 아침, 저녁 사대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종소리로 알렸는데

그 종루가 있는 거리의 뜻으로 종로라 불림

을지로4가
을지로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조선왕조 때는 구리개

로 불리던 이 길은 1914년부터는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 적도있다.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

로 을지로4가 명명되었다.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東大門運動場)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야구장,정구장을 완공하면서 경성운동장

으로 불려졌다. 원래 육상경기장은 조선 500년간 정병들의 선발과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고 또한 야구장은 훈련도감의 군영인 하도감이 있었는데 개항후에는 이곳에서 별기군이란

신식군대가 훈련을 받았다.

청 구
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을 제정

신금호
금호의 옛말은 무쇠막(무수막)으로 조선시대 한자음으로 수철리로 불리다 금호동이라 바뀌었다.

행 당
행당동 동명은 갑오개혁(1894)부터 행당리동으로 칭하여 내려온 것으로, 행당초등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행당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왕십리
왕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往十里)라 전해오고 있다.

마 장
조선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이곳에 있어서 마장동이라 불리게 됨

답십리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 곳을 밟았다 하여 답십리라 했다는 구전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동대문에서 걸어서 십리에 위치한 곳에서 유래됨

장한평

신라시대에 장한성(長漢城)이 축조되어 인근지역이 장한벌 또는 장한평으로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면서장안평으로 잘못 불려져 왔던것을 삼국시대부터 불리워진 이 지역의 옛 지명으로 다시

찾은 것임

군 자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리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차산
광진구 능동 일대에 있는 아차산을 고유지명으로 아차산과 아차성은 예로부터 평강공주와 온달

장군의 사랑과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광나루
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너분나루라고 불려졌다.

옛부터 강원·충청 등지의 광물, 목재 등의 주요 운송로로 이용되었고 행인과 상인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충지로 고려조에는 이곳에 수참을 설치하였음.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잃게 됨

천 호
원래 지명은 곡교리로 옛날부터 이 곳이 인가 수 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

에서 동명을 따온 것이다.

강 동
강동역의 유래는 인근에 강동구청이 자리하는 관계로 구를 대표하는 의미에서 쓰여졌다.

강동구는 1979년 10월 강남구가 분구되면서 신설되었다.

길 동
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길한 곳이라 하여 길동이라 불렸다는 설과 마을의 모양이 나뭇가지

처럼 길다하여 기리울이라 불리던 마을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굽은다리
당말이란 마을과 벽동이란 마을을 잇는 다리가 굽어있어 굽은다리라 불렀다. 두 마을을 합하여

굽은다리의 이름을 따서 곡교리라 하였다.

명 일
고려 성종 11년(994년)에 이곳에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서 명일원을 두어 여행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도모해 주었으므로 그이름을 따서 명일원,원텃골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고 덕
고려말 형조참의 이양중이 태조의 조선건국을 반대하고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벼슬도 거절하는

등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 받아 고덕리 또는 고덕마을로 불려지게

되었다.

상일동
상일동과 하일동의 사이를 흐르는 내(川)의 위쪽이므로 이름을 따서 상일동이라 칭함

둔촌동
광주 이씨의 시조이며 고려말의 은사인 이집이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이라 하였다.

올림픽공원
88올림픽을 계기로 형성된 올림픽공원과 올림픽기자촌 및 선수촌 아파트를 배경으로 역사가

위치함으로써 명명됨

방 이
마을의 지형이 아늑하고 개나리꽃이 많이 핀다고 하여 방잇골로 불리다가 한자음으로 방이동

이라 고쳐진 것이다.

오 금
일찍이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곳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오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설이있다.

개 롱
조선조 이조때 임경업장군이 갑박산에서 고리궤짝을 주어와서 현재 가락2동 개롱 근린공원

위치에서 고리궤짝을 열어보니 투구와 갑옷이 나왔다하여 개롱이라 전해옴

거 여
이 지역이 본래 경기도 광주군 중래면의 일부로서 거암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검이, 겜리라 불리다가 경기도 구역행정에 따라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라 부름

마 천
이 지역에 있는 마산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라 하였던 데서 유래된다는 설과 조선조 임경업 장군이 마산

(천마산)을 가는 도중 백마를 얻어 거여동을 지나다가 백마에 물을 먹여 백마물이란 곳이 있고, 아무리

가뭄이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馬川이라 하였다는 설이있음

* TOP 1호선 2호선 3호선 4호선 5호선 7호선 8호선역 명
  지 명 유 래

응 암
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매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매바위

골이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 곳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포수들이 기거하던 곳이

여러 곳 있었으며 궁중에서 나와 사냥터로 삼았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역 촌
역촌동은 조선조 신하들이 장거리 여행시 말이
쉬어갈수 있는역(延曙驛)이 있어 역말이라 불리어 여기서

역촌이 유래되었고, 옛 지명으로는 마방촌, 토정리라 불리었다.

불 광
불광이라는 지명은 글자 그대로 이 근처에 바위와 대소사찰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독바위
독박굴은 독바위굴의 줄임말로 독바위굴의 바위가 독(항아리)과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과,
유달리

바위가 많아 숨기 편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인조반정

당시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거사 직전까지 숨어 지내던 덕바위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신내
연신내라는 말은 연(延)시내(川) 즉, 延川(延曙川)의 우리말 풀이가 변한 것이라 전하여지고 일설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반정 당시 능양군(인조)이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 하여 연신내(延臣川)라 부르게 되었다.

구 산
경기도와 도경계를 이루는 뒷산의 산 모양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옛부터 그 아래 마을을 구산동이라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

새 절
새절은 신사의 한글 명칭으로 새절은 언제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새절이 있었으므로 해서

유래된 명칭이다.

증 산
증산동 뒤에 있는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같이 생겼으므로 시루메라 하며, 시루는 물이 새어 좋지 않다하여

아름다운 비단의 뜻을 빌어서 증산(繒山)이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 색
지역적으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수색동은 예로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으로 물치, 무르치라는

우리말에서 음이 변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수색, 수생리로 표기하였다.

성 산
부근에 산들이 성처럼 둘러져있어 우리말로"성메"또는"성미"라 부르던 성산(城山)이 있는데서 연유되었다.

마포구청
마포는 우리말 "삼개"로 불리워지는 포구이름 麻浦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사 인근에 마포구청이 위치하고

있어 마포구청역이라 명명

망 원
망원동은 효령대군이 지은 정자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장이었으며,성종5년(1484년)월산대군이

이름지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이 있었던 데서 유래됨.

합 정
합정동은 옛날 양화나루 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 보통 양화도라고 호칭하였고, 조개우물로 불리어지는

우물이 있다하여 합정(蛤井)이라 하다가 후에 합정(合井)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음.

상 수
상수동의 옛 지명은 서강방 수일리계였는데 한일합방 후 서강면 상수일리가 되었다가 상수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상수동이란 동명은 강가의 마을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흥창
조선시대 경기와 3남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수미를 쌓아 두었었다가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던 곳으로

그 규모는1년에 쌀19,000석, 대두18,000석을 보관할 정도의 대규모 창고가 있었다하여 광흥창이라 하였다.

대 흥
대흥동은 "동막하리"라 하여 인접한 용강동과 함께 독을 구워파는것을 업으로 삼았던 지역으로"독마을"로

불려졌다. 일제시대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들어가게 되면서 옹막, 옹리의 지명이 동막리로

변경되기도 했다. 1936년 경성부의 대흥정이 되었으며 그후 몇차례 행정구역의 통폐합을거쳐 1946년10월

오늘의 대흥동이 되었다.

공 덕
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덕",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

효창공원
백범로와 효창공원 길의 교차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역은 인근에 효창공원(문화재 사적 지정 330호)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공원 내에는 김구 선생묘, 삼의사 묘(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및 임정요인 묘(이동녕, 차이석,

조성환)가있어 사적지로 유서가 깃들인 곳이다.

삼각지
한강, 이태원, 서울역 방면으로 나있는 도로의 모양이 세모졌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녹사평
조선시대 고종까지만 하더라도 수림과 잡초가 무성하여 인가가 희소하던 곳이라 해서 녹사평(綠莎坪)이라

불리어진 것에서 유래.

이태원
조선시대 때 이태원(梨泰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는데 역원으로서의 이태원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그 명칭을 가진 동네가 용산구 동북쪽에 자리잡아 현재의 이태원동이 되었다.

한강진
한강진터가 있던 곳에서 유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제천정(濟川亭)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싸운 곳.

버티고개
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다산로(茶山路)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하는데 옛날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 하며, 도둑을 쫓았으므로 번티(番峙)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약 수
버티고개에 있는 약수(藥水 : 위장병에 특효가 있음)의 이름을 딴 약수동의 지명에서 유래.

청 구
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으로 제정.

신 당
조선 영조27년(1751년)에 반포된 수성책자『도성 3군무 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

신당리계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 남서 두모방(성외)왕십리계의 신당리동으로 되었는데 신당동은

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과 함께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하며 광희문 밖에

위치한 이곳은 많은 무당들이 모여 살아 무당촌을 이루어 新堂이라는 명칭이 유래됨.

동묘앞
중국의 고전인 삼국지에 나오는 명장 관우의 사당(보물 제142호)으로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가 꿈에 관우를 현몽한 후 왜병을 격퇴했다고 하여 명의 신종이 난(亂) 후에

비용과 친필로 쓴 현액을 보내와 선조때(1601년) 창건하였는데 그 후 영조15년(1736년)에 중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 신
창신동은 조선초(태조5년 1396년)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5부 52방 가운데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부터 "창신동"이라 하였고, 1943년 구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

동부출장소 관할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에 동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음.

보 문
보문동3가 168번지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동은 1949년 8월 대통령

제159호로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할 때 신설동의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설치된 것으로 당시 관내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제정한 것이다.

안 암
큰 바위가 있어 편히 쉴만하고 그 바위 이름을 "앉일바위"라 하였으며, 그것을 한자로 안암(安岩)으로

옮겨 쓴 것에서 유래됨.

고려대
고려대학교위 부지위에 역이 위치하여 대학명을 역명으로 사용. 종암동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鼓)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자로 종암(鍾岩)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월 곡
하월곡동에 있는 산의 형세가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그 산에 연해 있는 마을을 다릿굴(골) 월곡(月谷)이라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상월곡
상월곡동은 천장산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다하여 그 산에 접해있는 마을을 "다릿굴(골)"이라 부르는데서

유래, 이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골(上月谷里), 아래 지역을 아랫다릿골(下月谷里)"이라

불렀는데 1894년 갑오개혁때 월곡상리로 명명. 이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상월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름.

돌곶이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한맥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 경단을 꼬지에 꿰어 놓은 것 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른데서 유래하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석관동(石串洞)이라 함.

석 계
석계역은 석관동(石串洞)과 월계동(月溪洞)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여 석관동의 첫글자인 석(石)자와 월계동의

두 번째 글자인 계(溪)자를 조합하여 제정.

태릉입구
태릉은 불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적 201호로 조선11대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임.(그 북쪽에는 조선 명종과 원순왕후의 능침인 태강릉이 있음)

화랑대
인근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를 상징하는 화랑대를 역명으로 제정(국철 경춘선 화랑대역이 있음)

봉화산
봉화산은 일명 봉우재라고 불리는데 1963.1.1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됨. 봉화산이라는

이름에서 봉화와 관련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이 곳은 북쪽의 한이산으로부터 목멱산(남산)으로

전달하는 아차산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지난 1994.11월 봉수대를 복원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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