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동산행기(1)

08.07.05. 비봉과 사모바위의 전설을따라서-북 한 산

최윤영(연산동) 2017. 6. 12. 12:26

 

북한산  비봉(560m)*사모바위 -08.07.05.

 

서울 종로 평창. 은평 진관

산행구간 : 구기터널-각황사-성벽(탕춘대)-비 봉-사모바위-삼천사계곡-삼천사 

산행시간 : 약 3시간 30분 ( 산행거리 : 약 6 km )

참석인원 : 12 인 (5개 부부팀 외 2인)

 

성하의 계절 七月.

장마속에 걸쳐있는 후덥지근한 날씨덕에 열대야까지 ~

오랫만에 나서는 부부산행길이 우중산행이 될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지만 

모처럼 반가운 님들과의 만남속에 구기터널분소 입구로 �어들고

 

푸르른 나뭇잎새에 가려진 숲속 터널을 따라 쉬엄쉬엄 오르는듯 싶어도

흘러내리는 땀을 흠처내기 위한 더딘 발걸음은 자주 멈춰 서게 하지만 

더위를 씻어내는 탕춘대 성벽의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날때면 

살아 쉼쉬는 숲으로 더욱 깊숙히 �어들고 있는듯 싶다.

 

높이 솟아있는 암봉이 숲사이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비쳐질때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다가서는 손길이 바쁘게 고물 디-카에 흔적을 남기면서

북한산의 전경을 담아내는 즐거움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어느새 멀게만 느껴지던 능선에 올라 등산객들과 한몸이 되고

 

엣 아낙네가 머리에 이고있던 족두리 모양을 닮은 족두리봉과 

어린이들 눈으로 바라본 마징가젯트(또는 로버트태권브이)를 닮은 비 봉을

지나 멀리 떠난 여인을 사모하다 바위가 되었다는 믿거나 밀거나 사모바위

암봉의 전설을 따라  넓은 공터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며

 

푸짐한 상차림이 펼쳐지는 산상부폐의 식단이 화려하듯 주고 받는 정으로

우리만의 휴식을 즐기고 사모바위를 배경으로 산행의 흔적을 남기면서

삼천사 계곡 숲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서는 동안 이제까지와 달리

많은 물이 흘러 내리며 더위를 잊게하는 시원한 계곡으로 빠져들고 있다.

 

* 족 두 리 봉

*  향 로 봉

*  비  봉

 

비 봉(碑峰 560m),

북한산 국보  3호인 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가 있던 암봉위에

비봉이라 불리는 순수비는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1972년에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되어 있고,

순수비가 있던 자리에는 복제품(2006.10.19)이 설치되어 있다.

 

북한산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순수비는 비석을 세운 이래 1,400여년 동안 잊혀져 오다가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친구 김경연과 더불어 승가사(僧伽寺)에 놀러 갔다가

이 비를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비신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래쪽이 떨어져 나갔다 한다.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사 모 바 위

 

사모바위의 전설
조선 인조 임금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자가 전쟁터로 갔다가 다행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여인이 청나라로 끌려가고 없었기에 

남자는 여인이 풀려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청나라로 끌려갔던 여인들이 풀려났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산 자락(지금의 홍은동 지역)에 모여 살았는데.

돌아오지않는 여인을 찾으려고 남자는 그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그는 북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고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구기동 쪽에서 사모바위를 보면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엣 사모관대와 바위 모습이 흡사하다하여 사모바위로 불리기도 한다) 

 

* 들머리인 구기터널 각황사입구 에서 기념사진 

 

 

 

  

  

  

 

 

 

 

 

 

  

  

* 비  봉 정상 암봉위에 진흥왕 순수비

 

* 사모바위를 배경으로 

 

 

   

* 삼 천 사 계곡의 풍경

 

 

 

 

  

 

 

 

 

 

 

 

 

 

* 삼 천 사 연혁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 대사가 개산(開山)하였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승병들의 집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임란 중에 소실 되었으나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 길상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라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현재의 주지 평산 성운 화상이 부임하여 경내에 위치한 마애여래입상이 천년 고불(古佛)임을 입증하여 보물로 지정받고 30여 년의 중흥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 산령각, 천태각, 연수원, 요사채 등의 건물과 세존진신사리탑,

지장보살입상, 종형사리탑, 관음보살상, 5층 석탑, 중창비 등을 조성하여 현재의

문화재 전통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도도량,

참회도량, 수행도량으로서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다.